아침 일찍부터 로마 시내투어를 시작했는데 아직 반도 못본듯.
그렇다고 유적지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그만큼 볼것도 많고,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풍경을 제공한다.
이제 좀더 빨리 돌아봐야 해지기 전에 숙소에 돌아갈 수 있을 듯 하다.
캄피돌리오 광장 (Piazza Campidoglio)
고대 로마의 가장 중심부였던 언덕으로 16세기 미켈란젤로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고, 비록 작은 규모지만 품위 있게 장식되어 있는
이 언덕의 중앙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당당한 모습의 청동 기마상을 볼 수 있으며,
이 언덕 광장의 정면에 보이는 세나토리오 궁은 현재 로마시의 시청건물로 쓰이고 있다.
광장 바닥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좌우에 있는 건물들과 함께 미켈란젤로가 설계하였다,
왼쪽에 있는 건물이 카피톨리노 박물관, 오른쪽의 건물은 콘세르바토리 궁전이 있다.
정면의 건물은 로마 시청사로서 건물 양쪽으로부터 현관으로 이어진 계단도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것이다.
시청사 뒤쪽으로 돌아가면 포로로마노가 한눈에 보인다.
사람이 바라볼 때 먼거리가 좁아지게 보이는 착시를 없애기 위하여 그만큼 상부를 넓게하여 오를 때 계단 폭이 같게 보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Marcus Aurelius)
포로로마노 (Foro Romano)
고대 로마의 중심지로 처음에는 변두리 성의 사람들이 모이던 시장 터였다가
BC 6세기경부터 도시의 기능이 충실해져 상업, 종교,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신전 옆에 있는 산타 마리아 안타쿠아 성당은
포로로마노에 있는 가장 오래된, 사적 가치가 가장 높은 기독교들의 기도소였다.
그 밖의 건물은 기둥이나 초석 등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시청 뒤에서 내려다 본 포로로마노 모습으로 로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이다.
2천년 전의 유적과 천년 전의 유적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많은 것을 무언으로 말하는 곳이다
셉티미우스 황제의 개선문 (Arco di Settimio Severo)
포로 로마노의 북동쪽에 있는 흰색 대리석 개선문인데, 포로 로마노를 발굴할 때 가장 먼저 발굴된 것이라고 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146~211)의 즉위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3년에 세워진 것이며,
그는 아프리카 출신으로는 최초로 로마의 황제가 된 장군이었다.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
팔라초 베네치아 (Palazzo Venezia) : 왼쪽 붉은 건물로 1455년~1464년에 지은 것인데,
무솔리니가 그의 지휘 본부로 사용했으며,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팔라초 델레 아시쿠라치오니 제네랄리 (Palazzo delle Assicurazioni Generali) :오른쪽 대칭건물로 팔라초 베네치아를 모방해서
1906년 ~1911년에 지은 것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Monumento Nazionale a Vittorio Emanuele II)
1871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에 의해 로마 제국 이후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가 통일 되었으며,
1895년 설계를 하고 1911년에 준공되었으나, 실제로 모든 것이 완공된 것은 1935년이다.
국립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Monumento Nazionale a Vittorio Emanuele II)이 정식 명칭이지만,
보통은 간단하게 비토리아노 (Vittoriano)라고 한다.
기념관에는 비토리아(Vittoria, 승리의 여신) 조각상과 Il Pensiero(생각), l'Azione(행동) 조각상이 있다.
양 옆쪽 건물 열주 앞에는 한쪽에 2개씩 모두 4개의 금도금된
비토리아 (Vittoria, 승리의 여신) 조각상이 대리석 원주 위에 있다.
또 양쪽 건물 꼭대기에도 4마리 말이 끄는 전차(戰車)를 타고 있는 비토리아 여신 조각상이 있다.
비토리아(영어로 빅토리아)는 로마 신화에서 승리의 여신이며, 그리스 신화의 니케(Nike)와 같다.
국기 게양대 왼쪽에 크게 보이는조각상은 Giulio Monteverde가 청동으로 조각한 Il Pensiero (생각)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청동조각이 Francesco Jerace가 조각한 l'Azione (행동)이다.
건물 가운데에 있는 기마상은 당연히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황제인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청동상이다.
뒷편엔 유료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올라가게 되면
로마 시내를 전망 할 수 있다.
산타 마리아 디 로레토 성당 (Santa Maria di Loreto)-왼쪽 돔 : 1507년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돔과 랜턴은 75년 후에 완공
산티시모 노메 디 마리아 성당 (Santissimo Nome di Maria)-오른쪽 돔 : 1736년 ~1841년에 완공된
가운데 원주는 트라야누스 원주 (Columna Traiana, 콜룸나 트라야나)
로마 제국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던, 제13대 트라야누스(Traianus, 53~117) 황제가
2차에 걸친 다키아(Dacia, 현재의 루마니아) 전쟁(101~102, 105~106)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13년에 세운 것이다.
내부에 있는 185개의 나선형 계단으로 꼭대기 전망대로 올라 갈 수 있다.
원주의 높이는 30m이고, 기단을 포함하면 38m이며, 지름이 4m이며,
190m나 되는 원주의 프리즈(frieze)는 원주를 23번 감아 올라간다.
프리즈의 부조들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2번에 걸친 다키아 원정을 묘사한 것인데
원주 위에는 원래 독수리가 있었고, 후에 신격화된 트라야누스 황제의 나신상이 있었다지만,
중세 때 없어졌는데, 1588년에 성 베드로 조각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포로 디 트라야노 (Foro di Traiano)
둥근 모습으로 로마제국에서 가장 나중에 생긴 포로 (Foro)이다.
이탈리아어로 포로(Foro)는 영어로는 포룸(Forum)이라고 하는데,
고대 로마시대의 공공광장을 말하는 것이다.
토레 델레 밀리치에 (Torre delle Milizie)
포로 디 트리야노 너머로 보이는 탑으로, 보통 토레 디 네로네(Torre di Nerone, 네로의 탑)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네로 황제가 이곳에서 로마가 불에 타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에 의하면 네로 황제는 로마의 화재 당시에 로마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 실제의 그 보다 훨씬 더 나쁜 폭군으로 부풀려진 면이 있다고 한다.
어떤 때는 진실 보다도 전설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나 보다.
나보나 광장 (Piazza Navona)
86년에 토미티아누스 황제가 조성한 전차 경기장 유적지 위에 세워져 길다란 모양을 하고 있다.
콜로세움보다 더 크며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였다.
이후 바로크 시대에 와서 뛰어난 건축가들에 의해 둘레의 건물과 가운데 분수가 들어선
긴 타원형의 경기장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아름다운 광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광장에는 세개의 분수가 있는데 칼데라리의 '넵튠의 분수'
베르니니의 '4대강의 분수' 역시 베르니니의 '모로의 분수'가 있다.
성녀 아그네스 성당 (Sant'Agnese in Agone)
로마시대 이곳에 있던 전차 경기장에서 알몸으로 끌려나와 순교하였는데,
그때 그녀의 머리카락이 갑자기 자라나 몸을 덮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넵튠의 분수(Fontana dI Nettuno) 칼데라리 작품
판테온 (Pantheon)
그리스어로 '모든 신들'이라는 뜻,
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인 아그리빠 장군이 설계하고 만들어졌다.
서기 80년에 큰 불이나 손상되었지만 12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어
19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완벽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원래 지붕은 금으로 도금되어 있었지만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없어졌다고 합니다.
돔은 건물 전체 높이의 정확히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고,
내부 원의 지름과 천정의 높이는 똑같이 42.3m로 균형을 이룬다.
기둥없이 두께 6m의 벽체만으로 받쳐져 있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위로 갈수록 벽의 두께가 얇아지고,
돔 가운데 뚫린 지름 9m의 둥근 창으로만 빛이 들어오며, 건물 내부의 공기흐름으로 인해 이 창으로 비가 들이치지 않는다.
치밀하고 완벽한 설계로 미켈란젤로도 극찬을 했다.
라파엘로가 죽기 전에 판테온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하여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이탈리아의 국부인 빅토리오 엠마누엘레2세, 움베르토 1세등도 묻혀 있다.
산티냐치오 디 로욜라 (Church of Sant'Ignazio Di Loyola)
루도비시 추기경이 1626년 예수회의 설립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티우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건립했으며 제수와 함께 예수회 교회의 중심이었다
아드리안 신전 (Tempio di Adriano)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 (Colonna di Marco Aurelio)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4.26~180.3.17]는 고대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
러쎌 크로우 주연의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아들의 손에 죽는 황제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친숙한 인물이다.
그 황제가 도나우 강변으로 침략한 마르코만니족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기둥이다.
카메라 데이 데푸타티 (Camera dei deputati), 하원의사당
트래비 분수 (Fontana di Trevi)
트래비란 '광장으로 이어지는 세 갈래 길'을 뜻하는 로마 교외의 지명으로
그 지역의 샘물을 끌어들여 분수를 만들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라한다.
바로크 양식의 걸작인 '두 해마와 신들이 끌어올린 조개위 넵튠' 조각이 있다.
뒤돌아 어깨넘어로 동전 하나를 던지면 다시 로마로 오게되고,
둘을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개를 던지면 이별을 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는곳.
비밀통로로 통하는 문 (Gate for Secret way)
무원죄 수태 기념비 (Colonna dell'Immacolata)
미냐렐리 광장 (Piazza Mignanelli)에 있는 원주기둥으로 성모 마리아는 이미 원죄 없이
수태되었다는 교리(무염시태, 無染始胎)를 인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기념비 위에 성모마리아상이 있다.
스페인 광장 (Piazza di Spagna)
17세기에 교황청 주재 스페인 대사관이 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스페인 계단의
원래 이름은 트리니타 데이 몬티 계단 (Scalinata della Trinita dei Monti)이다.
계단 바로 뒤에 보이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Chiesa della Trinita dei Monti, 삼위일체 성당)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494년 성 프란시스 (Francesco di Paola)가 포도밭이 있던 자리에 수도원을 설립했고,
프랑스의 루이 7세 (Louis XII, 1465~1515)가 그의 나폴리 정복을 축하하기 위해
이 수도원 옆에 1502년부터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후기 고딕 양식의 아치가 있는 프랑스 양식으로 건축되던 성당은 건축이 지연되면서
점차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1585년에 완공되었다.
성당의 양쪽 탑 사이에 있는 높이 13.91m (기단을 포함한 높이는 30.45m)의
살루스티아노 오벨리스크 (Obelisco Sallustiano)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Aurelianus, 214~275) 때 만든 오벨리스크를
후대에 작게 복제한 것으로, 1789년에 이 자리에 세워졌다.
유럽에서 가장 길고 넓은 137개의 계단은 17세기에 이 성당의 프랑스 신도들이
스페인 광장과 연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계단 바로 앞에는 난파선 분수 (Fontana della Barcaccia, 바르카치아 분수)가 있는데,
바르카치아는 '오래된 배'라는 뜻이다.
교황 우르바노 8세 (Urbanus PP. VIII, 1568~1644)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반쯤 가라앉은 배의 모습이다.
로마의 티베레 (Tevere)강변의 둑이 완성 되기 전에는 강이 자주 범람되었는데,
특히 1598년에는 아주 큰 홍수가 나서 스페인 광장에 1m 가까이 물이 차올라 와서
난파된 배까지 발견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난파된 배를 형상화한 분수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
포폴로광장 (Piazza del Popolo)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19세기에 주세페 발라디에르에 의해 완성되었다.
중앙의 오벨리스크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 정복 후 가져왔다.
남쪽에 있는 쌍둥이 교회 산타마리아 데이 미라콜리와 산타마리아 인 몬테산토는
교황 알렉산드르 7세의 명령으로 세워졌다.
18~19세기에는 이 광장에서 종종 공개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오벨리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