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주간 야간으로 쉴틈을 주지 않는다.
주간 투어를 마치고 숙소에서 저녁을 먹고 잠시 쉬면
야간투어를 나가야 한다.
하루에 16시간은 걸어다니는 것 같다.
오늘은 로마 시내 야간투어다.
오전에 1일 교통권을 구매해서 따로 티켓을 구매하지 않아도 되는건 마음에 든다.
중간에 한번은 무단승차를 하는데 야간이라 티켓 검표 직원들 퇴근했을거라며 걱정 말란다.
숙소를 나설때면 항상 예쁜 간판이 반겨준다.
테르미니역에 집결해서 지하철을 타고 콜로세움으로...
콜로세움 (Colosseum)
로마 제국 시대에 세워진 가장 큰 원형 경기장으로, 영어로는 콜로세움(Colosseum)이라고 하며,
우리에게는 이 영어 이름이 익숙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은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콜로세오의 정식 이름은 라틴어로 플라비움 원형 경기장이라는 뜻으로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Amphitheatrum Flavium)이며,
플라비움은 이 경기장을 만든 로마 제국의 플라비아누스 황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플라비아누스 황조는 69년 로마 제국 최초의 평민 출신으로 황제가 된 제 9대 베스파시아누스에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두 아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있는데,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면서 3명의 황제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경기장이 세워지기 전, 원래 이 자리에는 64년 로마의 대화재 이후
네로 황제가 세운 궁전인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내의 인공 호수가 있었다.
Domus Aurea는 라틴어로 '황금 궁전'이라는 뜻이며,
입구에는 아주 커다란 네로 황제의 청동 조각상이 있었는데,
이 거대한 조각상을 콜로수스(colossus)라고 하며 콜로세오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네로의 거대 조각상은 네로 황제 이후에는 다른 황제의 얼굴로 대체되어 내려 오다가
11~12세기경에는 아주 없어졌다고 하니, 알마나 컸었는지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어 유감이다.
이 경기장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인 70년 경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황제의 아들 티투스가 70년에 예루살렘 원정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71년 로마로 귀환하면서
유대인 포로들을 많이 끌고 왔고, 이들 중 일부는 콜로세오 건설 공사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공사는 10년 가까이 걸려서 티투스가 황제가 된 후 80년에 완공되었으며,
이 거대한 건축물의 완공 기념 축하연은 10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는데,
이 대단한 건축물이 누구의 설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연히 당시에는 알았겠지만...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뜻의 콜로수스(colossus)에서 콜로세오가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어디에서 유래되었던 간에 거대하다는 것은 똑 같으니, 고대 로마인들의 큰 스케일이 놀라울 뿐이다.
높이 48m의 4층으로된 이 경기장은 타원형이며, 둘레는 527m, 타원의 긴 직경은 188m,
짧은쪽은 156m이며, 내부는 길이가 87m, 폭이 55m나 되는, 그 당시로서는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
2,000년 전에 화산재와 석회로 만든 6,000 톤 이상의 로마 시대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세운 이 경기장은
5만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경기가 끝나면 많은 관중들이 여러개의 출구로 단시간에
쉽게 경기장을 빠져 나갈 수 있는 구조라고 하니,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경기장에서는 주로 검투사들끼리의 경기, 또는 검투사와 맹수들과의 경기가 있었는데,
이 경기를 보는 로마 시민들에게 일체감 내지는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또 로마 제국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 일으킬 목적으로 건설되었다는 말도 있다.
이 경기장에서는 이런 검투 경기 외에도 유명한 전투 장면의 재연도 있었는데,
특히 초기에는 콜로세오 바닥에 물을 채우고 상연한 나우마키아 (naumachia)라는
대규모 모의 해전도 있었다는데, 이들의 연극적 감각이 대단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호전성이 대단했다고 해야할까?
4층으로된 콜로세오에는 건축 양식도 여러가지가 사용되었는데,
1층에는 도리아식 원주, 2층에는 이오니아식 원주, 3층에는 코린트식 원주들이 사용되었다.
4층에는 뜨거운 로마의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차양 고정 장치가 있는 벽이 세워져 있다.
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검투사들의 공간과 맹수들의 우리도 있었고, 상인들의 공간인 갈레리아도 있었다.
로마시민들의 오락성 경기장으로 사용되던 이곳이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6세기에는 경기장 내에 작은 성당이 세워지기도 했고,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하다가.
1200년 경에는 이탈리아의 유력 정치가 가문의 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349년에는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무너진 돌들이 성당이나 팔라초를 짓는데 다시 사용되기도 했다.
그후 18세기에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 받고 순교한 정소로서 신성시 되기도 했지만
초기 기독교인이 이곳에서 순교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없다고 한다.
콜로세오는, 2007년 7월 7일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개최된 세계 신 7대 불가시의 재단 회의에서
세계의 신 7대 불가사의에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인터넷과 전화 투표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멕시코의 치첸이트사 (고대 마야 유적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의 구세주 예수상, 중국의 만리장성,
페루의 마추픽추, 요르단의 페트라, 인도의 타지마할이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Arch of Constantine)
콜로세오와 포로 로마노 사이에 있는 이 개선문은,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센티우스 황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서로마 제국을 통일한 것을 기념하여 315년 원로원이 세운 것이다.
로마의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로 올 때는 이 개선문을 통과해서 들어 왔다고 한다.
높이 21m, 너비 25.7m인 이 대리석 개선문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업적과 전투 장면이 묘사된 부조가 새겨져 있으며,
코린트식 원주 위에 있는 앞과 뒤 8개의 조각상과 부조는 옛날의 건물에서 떼어서 이 개선문에 붙여 놓은 것이다.
개선문의 옆에도 전투 장면을 묘사한 부조가 새겨져 있으며, 명문도 조각되어 있다.
정면과 후면에 코린트 양식의 원주들이 4개씩 모두 8개가 세워져 있는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세계 최대 에투알 개선문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포로 디 트라야노 (Foro di Traiano)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Monumento Nazionale a Vittorio Emanuele II)
불가리아 정교회 성당
코린트식 기둥이 아름다운 이 건물은 원래 1646년 ~1650년에 건축된
카톨릭 성당 (Chiesa dei Santi Vincenzo e Anastasio a Trevi)이었는데,
2002년 당시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불가리아 정교회에 이 성당을 선물로 주었기 때문에,
현재는 불가리아 정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정교회는 자신들이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온 정통 기독교라는 뜻에서 정교회라고 하는데 반해,
카톨릭이나 개신교, 성공회등에서는 동방 교회 또는 동방 정교회라고 부른다.
동방 정교회는 8세기 이후 로마 카톨릭과 갈등으로 서로 분열되으며,
1054년에는 서로를 파문했으나 교류는 지속되었는데,
1204년 제 4차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이 동방 정교회의 본산지인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파괴한 것을 계기로 더욱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러시아와 동유럽 중앙 아시아에 신도가 많은 동방 정교회는
카톨릭의 교황청 같은 조직은 없고, 국가별 또는 민족별로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등이 있으며,
각 교회의 주교 중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세계 총대주교로 불린다.
트래비 분수 (Fontana di Trevi) 뒤돌아 어깨넘어로 동전 하나를 던지면 다시 로마로 오게되고,
둘을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개를 던지면 이별을 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는곳.
스페인 광장 (Piazza di Spagna) 17세기에 교황청 주재 스페인 대사관이 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스페인 계단의
원래 이름은 트리니타 데이 몬티 계단 (Scalinata della Trinita dei Monti)이다.
난파선 분수 (Fontana della Barcaccia, 바르카치아 분수)
바르카치아는 '오래된 배'라는 뜻이다.
교황 우르바노 8세 (Urbanus PP. VIII, 1568~1644)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반쯤 가라앉은 배의 모습이다.
로마의 티베레 (Tevere)강변의 둑이 완성 되기 전에는 강이 자주 범람되었는데,
특히 1598년에는 아주 큰 홍수가 나서 스페인 광장에 1m 가까이 물이 차올라 와서
난파된 배까지 발견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난파된 배를 형상화한 분수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